1화
차은호와 오전에 막 혼인신고를 마쳤는데, 그는 그날 오후에 나를 데리고 와서 이혼했다.
나는 혼인신고서와 이혼 서류를 손에 꼭 쥔 채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옆에서 차은호의 친구들이 나를 비웃었다.
“차은호, 윤시아가 한마디 했다고 진짜 저 아가씨랑 결혼했다가 바로 이혼까지 한 거야?”
“하하, 저 아가씨 얼굴 좀 봐. 새하얗게 질렸잖아. 혹시 울려는 거 아니야?”
하지만 차은호는 입양된 여동생 윤시아의 어깨를 감싸 안고 다정하게 말했다.
“네가 시키는 대로 했으니까 이제는 나한테 웃어 줄 거지?”
그러자 윤시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싸늘하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내가 앞으로 나서서 따지려고 했지만, 세 오빠가 나를 꽉 붙잡고 꼼짝도 못 하게 했다.
회사 대표인 큰오빠가 미간을 찌푸렸다.
“시아를 웃게 할 수 있는 건 은호뿐이야. 그러니까 방해하지 마.”
톱스타인 둘째 오빠는 나를 바닥에 밀치면서 넘어뜨렸다.
“시아는 처지가 딱하잖아. 넌 부족한 것도 없으니까 남자 하나 양보할 수는 있잖아.”
교수인 막내오빠도 얼굴을 굳혔다.
“은호가 애초에 결혼했어야 할 사람은 시아야. 이제 그만 좀 매달려.”
세 사람은 자신들의 첫사랑인 윤시아의 행복을 내가 방해하지 못하게 억지로 나를 차에 밀어 넣었다.
그 순간, 오랫동안 자취를 감췄던 시스템이 마침내 다시 활성화됐다.
[호스트님, 공략 퀘스트 완료가 감지되었습니다. 즉시 현실 세계로 돌아가시겠습니까?]
나는 뒷좌석에 앉아 침울하게 창밖을 바라보다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공략 퀘스트를 위해 연기해 온 시간이 드디어 끝이 났다.
저 인간들이 사랑하고 미워하며 어떻게 얽히든, 이제부터 나는 더 이상 상대해 주지 않을 거다.
제1화
[백씨 가문 도련님들과 남주의 호감도가 95%에 도달했습니다. 남주 차은호와의 결혼 퀘스트 완료! 호스트님의 퀘스트 완료를 축하드립니다!]
[호스트님의 육체가 사망하면 현실 세계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상금 200억 원도 지급되며, 골수암도 완치됩니다!]
나는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환희를 꾹 눌렀다.
‘드디어 돌아갈 수 있어!’
큰오빠와 막내오빠는 윤시아의 곁에 남고, 둘째 오빠가 나를 집으로 데려가게 됐다.
나는 무심코 옆자리에 앉은 둘째 오빠 백서준을 바라봤다.
차에 탄 뒤로 줄곧 굳은 얼굴로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있었는데, 윤시아에게 메시지가 오자 그제야 비로소 웃었다.
내 시선을 알아차린 백서준은 곧바로 핸드폰 화면을 끄고 미간을 찌푸렸다.
“왜? 아직도 포기가 안 돼? 다시 돌아가서 은호랑 시아를 방해하려고? 시아는 아직 어리고, 그동안 고생도 많이 했잖아. 왜 걔를 못 놔주는 건데?”
나는 주먹을 꽉 쥔 채 자조적으로 웃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윤시아보다 한 살이나 어렸다.
내 얼굴빛이 너무 안 좋아 보였는지 둘째 오빠가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일은 네가 잘못한 거니까 시아한테 사과해. 너무 제멋대로 굴지 말고.”
손을 뻗어서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했지만, 나는 살짝 피하면서 물었다.
“왜 내가 사과해야 하는데? 내가 뭘 잘못했어?”
둘째 오빠의 손길이 멈칫하더니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백지수! 적당히 해!”
나는 눈을 감았다.
퀘스트 때문이었다고 해도, 이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하다 보니 어느 정도 정이 든 건 사실이었다.
그들의 태도 때문에 진심으로 상처를 받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전부 지난 일이었다.
“시아 대회 끝나면 우리랑 같이 가서 사과해.”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속으로 시스템에 확인했다.
[이 몸이 죽기만 하면 현실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거지?]
[네.]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창밖으로 주변을 살폈다.
다른 사람이 다치지 않을 거라는 걸 확인한 뒤, 잠금을 풀고 힘껏 차 문을 잡아당겼다.
계속 잔소리를 늘어놓던 둘째 오빠가 비명을 질렀다.
“지수야, 너 뭐 하는 거야!”
나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차에서 뛰어내렸다.
차가운 바람이 세차게 뺨을 스치면서, 몸이 허공으로 붕 뜨는 듯한 감각이 밀려왔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 순간, 누군가가 내 허리를 거칠게 끌어안았다.
그 사람은 나를 품에 감싸안은 채 도로 가장자리 수풀 쪽으로 함께 넘어졌다.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와중에 낮은 신음이 들렸다.
우리는 엉망으로 몇 바퀴나 구른 뒤에야 멈췄다.
나를 끌어안고 있던 사람은 나뭇가지에 긁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됐지만, 나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고개를 들자 공포에 질린 둘째 오빠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놔.”
둘째 오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내 얼굴을 빤히 보더니 버럭 소리쳤다.
“너한테 몇 마디 했다고 이까짓 일로 차에서 뛰어내려? 우리가 진짜 널 너무 오냐오냐 키웠어! 또 우리 관심 끌려고 이러는 거지? 그런 뻔한 수작 좀 그만 부려!”
나는 못 들은 척 그의 손을 떼어 냈다.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쪽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검은색 차 한 대를 발견했다.
“내가 알아서 뛰어든 거니까, 저 차는 꼭 수리해 줘.”
그 말을 남기고 나는 검은색 차를 향해 몸을 던졌다.
“지수야!”
둘째 오빠가 절망에 찬 목소리로 절규하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이미 한발 늦었다.
나는 희망에 부풀어 죽음을 기다렸다.
현실 세계로 돌아가기만 하면 골수암도 완치된다. 그러니 이 세계에는 단 1초도 더 머물고 싶지 않았다.
날카로운 브레이크 소리가 울렸다.
그런데 검은색 차는 결국 내 앞에서 멈춰 섰다.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던 나는 곧바로 달려온 둘째 오빠의 품에 쓰러졌다.
“너 미쳤어? 지수야, 너 진짜 미친 거야?”
눈시울이 벌게진 둘째 오빠가 손가락으로 내 뺨과 어깨를 더듬었다.
“차에 치인 데 없어? 어디 아파? 말해!”
또다시 죽지 못했다.
나는 실망감에 휩싸인 채 눈을 내리깔았다.
시선이 둘째 오빠의 다리에 닿았다.
바지는 이미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한눈에 봐도 심하게 다친 듯했고, 피는 계속해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예전의 나였다면 벌써 숨도 제대로 못 쉴 만큼 울어 대며, 차라리 내가 대신 다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저 무심하게 시선을 돌렸다.
“왜? 이제는 죽는 것도 오빠들 허락을 받아야 해?”
제2화
둘째 오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나는 코웃음을 치고 그를 지나쳐서 욕설을 내뱉고 있는 검은색 차 운전자에게 다가갔다.
“기사님한테 물어줄 돈은 나중에 오빠한테 보내 줄게.”
둘째 오빠는 주먹을 꽉 움켜쥐면서 눈가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의아했다가 이내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아, 백씨 가문 돈은 안 썼어. 내가 직접 번 돈으로...”
“지수야!”
둘째 오빠가 더는 참지 못하고 내 말을 끊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의 얼굴에는 서운한 기색이 살짝 비쳤다.
“넌 백씨 가문의 하나뿐인 딸이야. 백씨 가문 재산을 전부 네가 가져간다고 해도 나는 아무 불만도 없어!”
나는 왠지 우스워서 둘째 오빠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둘째 오빠의 몸이 움찔했다. 이제야 뭔가를 깨달은 듯했다.
지금 명목상 백씨 가문의 딸은 윤시아였다.
반면 진짜 백씨 가문의 아가씨인 나는 온갖 악명만 뒤집어쓴 망상증 환자에 불과했다.
나는 웃음을 터뜨렸지만,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예전에는 둘째 오빠와 늘 붙어 다녔다.
오빠는 촬영장에도 나를 데리고 다녔다.
하지만 지금의 둘째 오빠는 차가운 얼굴로 무슨 일이든 윤시아에게 양보하라고 나를 윽박지를 뿐이었다.
둘째 오빠는 나를 잡아끌어서 차에 태운 뒤 나직이 말했다.
“시아가 이번 물리학상을 받고 나면, 네가 백씨 가문의 진짜 딸이라고 우리가 밝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은 전부 오해였을 뿐이야...”
나는 상대하기도 귀찮아서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바라봤다.
창밖의 풍경은 끊임없이 뒤로 밀려나며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이 세계로 넘어오기 전, 나는 고아였다.
건강검진을 받던 중 골수암이 발견됐다.
나는 병상에 누워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다 의식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시스템에 의해 이 세계로 보내진 여섯 살 아이가 되어 있었다.
머릿속에 한 목소리가 울렸다.
[백씨 가문 형제들과 남주 차은호의 호감도를 80까지 올린 뒤 차은호와 결혼하면, 상금 200억 원을 받고 현실 세계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고는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한바탕 이어졌다. 나는 하마터면 방금 들은 목소리가 착각이었다고 생각할 뻔했다.
그래도 한 번 더 살 수 있고 건강한 몸까지 얻었으니 나쁘지 않았다.
차는 조용히 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고, 둘째 오빠는 내 손목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손끝으로는 내 손등을 살살 문질렀다.
예전에 잠 못 이루는 나를 달랠 때 하던 행동이었다.
고아였던 나는 한때 이 각별한 사랑을 놓지 못했다.
심지어 퀘스트를 포기하고 이곳에 남을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내가 데려온 고아 윤시아가 나타난 뒤, 그 모든 다정함은 윤시아의 몫이 됐다.
나는 애교도 부리고 토라지기도 했지만, 결국 절망해서 악을 쓰기까지 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돌아온 건 이 말뿐이었다.
“그만 좀 해. 지금 네 꼴이 이게 뭐야?”
차가 백씨 가문 저택의 대문 앞에 멈추자, 나는 둘째 오빠의 손을 뿌리치고 차에서 내렸다.
둘째 오빠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나를 불러 세웠다.
“지수야, 나 다쳤어. 너 때문에 다친 거야...”
나는 무표정하게 둘째 오빠의 말을 끊었다.
“다쳤으면 병원에 가. 나한테 말해서 뭐 하게?”
백씨 가문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소파에 앉아서 모두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는 윤시아였다.
큰오빠 백도진은 다소 심각한 표정이었다. 싸늘한 얼굴로 차은호의 어깨를 주먹으로 한 대 치면서 말했다.
“너 때문에 시아가 꼬박 사흘 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잤어! 대체 애를 어떻게 돌본 거야?”
윤시아가 황급히 말리러 나섰다.
“큰오빠, 작은 오빠, 나 정말 괜찮아. 다 오해였어. 얘기해서 풀렸으니까 됐어.”
나는 문 앞에 서서 그들의 돈독한 남매애를 가만히 지켜봤다.
[호스트님, 도파민 수치 저하가 감지되었습니다.]
시스템의 기계적인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혹시 호스트님, 지금 슬프신 건가요?]
제3화
시스템의 한마디에 하마터면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나는 황급히 눈가에 맺힌 물기를 닦아 냈다.
둘째 오빠가 내 곁으로 다가와서 막 입을 열려던 순간, 윤시아가 놀란 목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둘째 오빠, 어떻게 이렇게 심하게 다쳤어? 오빠...”
윤시아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내가 앞으로 나서면서 뺨을 때렸다.
윤시아는 붉게 부어오른 한쪽 뺨을 감싸 쥔 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거의 동시에 손바닥이 날아들었고, 나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큰오빠가 분노로 가득 찬 얼굴로 나를 가리켰다.
“백지수! 우리가 널 너무 오냐오냐 키웠어! 시아한테 사과해!”
나는 바닥에 쓰러진 채 입안에 고인 피를 뱉었다.
“내가 사과하라고? 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데? 결혼했다가 또 버림받은 이혼녀 신세가 됐는데, 불륜녀 뺨 한 대도 못 때려?”
큰오빠의 분노는 더욱 거세지면서 목소리까지 한껏 높아졌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시아랑 은호는 원래 이어질 사이였어. 네가 억지로 끼어든 거잖아!”
“내가 어떻게 너 같은 뻔뻔한 동생을 뒀지?”
나는 기가 차서 허 웃었다.
“뻔뻔해? 차은호는 내 약혼자였어. 그런데 이제 와서 내가 끼어든 사람이 됐네!”
차은호가 차갑게 나를 노려봤다.
“우리 약혼은 진작 깨졌어! 차씨 가문은 너처럼 평판이 바닥인 여자는 절대 받아들이지 않아!”
막내오빠 백우진이 바닥에 쓰러진 나를 잡아끌면서 일으켰다.
“백지수! 사과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눈앞의 사람들을 차례로 훑어봤다.
큰오빠의 눈빛은 차갑기만 했고, 막내오빠의 얼굴에는 혐오의 기색이 가득했다.
차은호는 내가 죽기라도 바라는 듯했다.
둘째 오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입술을 달싹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년 전에도 지금과 똑같았다.
둘째 오빠와 자주 어울리던 윤시아를 팬들이 사생팬으로 오해한 적이 있었다.
둘째 오빠는 그 모습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는지, SNS에 윤시아가 백씨 가문의 딸이라는 사실을 공개했다.
정작 진짜 백씨 가문의 아가씨인 나는 윤시아 대신 온갖 욕을 뒤집어써야 했다.
“넌 어딜 가든 경호원이 따라다니잖아. 시아는 혼자라고!”
나는 억울해서 반발했고, 울고불고 소란까지 피웠다.
그때 모두가 나를 바라보던 눈빛도 오늘과 똑같았다.
이제는 말로 표현하기도 힘들 정도로 지쳐 있었다.
변명하고 따질 힘조차 남지 않았다.
나는 막내오빠의 손을 뿌리치고 거실로 뛰어 들어가서 테이블 위에 있던 과도를 집어 들었다.
둘째 오빠가 겁에 질려 달려오려고 했지만, 윤시아가 그의 팔을 끌어안았다.
“지수야, 너 뭐 하려는 거야?!”
나는 윤시아를 바라보며 웃었다.
“사과하려고!”
잔뜩 경계한 큰오빠와 막내오빠, 차은호는 더 이상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는 손을 들어 망설임 없이 칼을 가슴에 찔러 넣었다.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나는 웃으면서 동시에 울었다.
“내 목숨으로 갚으면 충분하지? 이제 만족해?”
따뜻한 피가 순식간에 옷을 적셨다.
피를 많이 흘린 탓에 어지러워서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었다.
누구의 것인지조차 구분되지 않는 절규가 들려오는 가운데, 점점 어두워지는 시야 너머로 그들의 얼굴이 공포에 질려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둘째 오빠가 달려와서 내 몸을 끌어안고 미친 듯이 절규했다.
“구급차 불러!”
...
짙은 소독약 냄새 속에서 나는 눈을 떴다.
시야 가득 들어온 하얀색에 가슴이 살짝 들떴다.
‘성공해서 돌아온 건가?’
그런데 고개를 돌리자 잔뜩 충혈된 큰오빠의 눈과 마주쳤다.
나는 짜증스럽게 눈을 감았다.
큰오빠의 갈라진 목소리가 이렇게까지 시끄럽고 귀찮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백지수! 누가 관심 끌려고 죽겠다고 난리 치는 법을 가르쳤어!”
짜증이 더욱 치밀었다.
뒷머리에 뭔가 딱딱한 게 배겨 불편했다.
손을 뻗어서 잡아당겨 보니 조금 낡은 부적이었다.
내가 12살이던 해, 꼬박 일주일 동안 고열이 떨어지지 않으면서 병원에서 세 번이나 위독하다는 말을 들었다.
막내오빠는 한 걸음마다 한 번씩 절을 올리며 천 개의 계단을 올랐고, 나를 위해 이 부적을 받아왔다.
그러다 나중에 윤시아가 다치자, 막내오빠는 이 부적을 가져다가 그녀에게 줬다.
그 부적이 지금 다시 내 손에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저 거추장스럽게 느껴져서 밖으로 던져 버렸다.
마침 그때 막내오빠가 병실로 들어왔다.
그는 부적이 바닥에 떨어지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다.
막내오빠가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지수야, 그 부적을 버린 거야?”
제4화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담담하게 말했다.
“더러운 물건을 버리겠다는데, 그것도 안 돼?”
막내오빠의 가슴이 거칠게 들썩거렸다. 눈에는 상처와 분노가 가득했다.
그는 갑자기 발을 들더니 부적을 거칠게 짓밟았다. 그리고 비웃듯 말했다.
“지수야, 오냐오냐 키워 줬더니 정말 인정머리도 없구나! 넌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인간이야! 그러니까 은호가 너 대신 시아를 선택한 거야. 너는...”
“우진아!”
큰오빠가 다소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막내오빠는 눈이 붉어진 채 나를 깊이 응시했다.
내 얼굴에서 아주 조금이라도 슬픔이나 후회의 기색을 찾아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그가 본 건 아무런 동요도 없는 내 얼굴뿐이었다.
막내오빠는 화가 나서 온몸을 떨었다. 이를 악문 채 잔뜩 억누른 목소리로 내뱉었다.
“지수야! 그 부적은 시아 거야. 너한테 잠시 빌려준 것뿐인데 네가 무슨 권리로 버려!”
이상할 만큼 내 마음은 평온했다.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새로 받아다 줄게.”
내 태연한 반응에 막내오빠는 완전히 격분했다.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아직도 아무렇지 않은 척해? 좋아. 그럼 지금 당장 가서 부적 하나 새로 받아와! 천 계단이야. 단 한 계단이라도 빼먹으면 안 돼!”
큰오빠가 말리려고 했지만, 막내오빠가 눈빛으로 제지했다.
큰오빠 역시 이 기회에 내 성질을 좀 꺾어 놓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내 상처가 생명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라는 말만 듣고, 내가 관심을 끌려고 벌인 쇼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도시 외곽의 산에 자리잡은 사찰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천 개의 계단은 빗물에 젖어서 미끄럽고 차가웠다.
나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비에 젖은 옷이 상처에 달라붙을 때마다 통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막내오빠에게 갚는 셈 치자.’
그렇게 한참을 올라간 끝에 마침내 새 부적을 받아 들었다.
온몸은 흠뻑 젖었고, 머리도 점점 멍해지며 뜨겁게 달아올랐다.
백씨 가문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한창 떠들썩한 축하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윤시아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물리학상 트로피를 품에 안고 활짝 웃고 있었다.
내가 나타나자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깨졌다.
가장 먼저 큰오빠가 미간을 찌푸리며 호통쳤다.
“백지수! 네 꼴이 지금 그게 뭐야? 백씨 가문의 아가씨다운 모습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기는 해?”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쏠렸다.
경멸도 있었고 짜증도 있었지만, 걱정하는 시선만은 없었다.
주변의 시선을 모두 무시하고 곧장 윤시아 앞으로 걸어간 뒤, 나는 부적을 그녀의 손에 올려놓았다.
윤시아는 뜻밖이라는 듯 손을 움츠렸다. 하지만 눈에는 순간 득의양양한 기색이 스쳤다.
“지수 언니, 이러지 마. 난 언니를 탓한 적 없어...”
나는 그 가식적인 모습을 더 보고 싶지도 않아서 그대로 돌아섰다.
뒤에서 큰오빠와 막내오빠가 나를 꾸짖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못 들은 척 곧장 내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서랍에서 미리 준비해 둔 면도날을 꺼내 손에 쥐었다.
이번에는 정말 끝낼 수 있기를 바랐다.
곧 정신이 빠르게 흐려졌다.
문밖에서 둘째 오빠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수야, 문 열어. 너한테 할 말이 있어.”
나는 이미 기운이 빠져 입을 열 힘조차 없었다.
막내오빠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경 쓰지 마! 또 심술 부리면서 불쌍한 척하는 거겠지. 우리가 너무 오냐오냐해 줘서 갈수록 제멋대로잖아!”
결국 둘째 오빠도 더는 고집하지 않았다.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나는 마침내 바라던 대로 눈을 감았다.
의식이 완전히 끊어진 순간, 몸이 한없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영혼이 몸을 벗어나 허공으로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방문이 거칠게 부서질 듯 열렸다.
큰오빠가 굳은 얼굴로 뛰어 들어왔고, 그 뒤를 둘째 오빠와 막내오빠가 따라왔다.
“지수야, 너 또...”
목소리가 뚝 끊겼다.
방 안의 광경을 확인한 세 사람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